인천공항 46번 게이트에 사는 가족을 아십니까?
두루 이상현 변호사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터미널>에서, 동유럽 어느 작은 나라 출신의 주인공은 부푼 꿈을 안고 뉴욕 JFK 공항에 도착한다. 그런데 그가 미국으로 날아가는 동안 본국에서 내전이 일어나서 그의 비자가 취소되는 바람에, 그는 미국으로 입국할 수도 없고 전쟁터로 변해버린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영화는 9개월간 이어지는 그의 ‘공항 노숙생활’을 그린다.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2019년의 인천공항에서도 벌어졌다. 6인의 난민가족이 288일 동안 인천공항에서 노숙을 하게 된 것이다. 루렌도(Lulendo)씨 부부는 네 명의 아이와 함께 앙골라에서의 박해를 피해서 한국에 왔다. 하지만 행정당국은 이 가족의 입국을 막았고, 정식 난민심사를 받을 기회도 주지 않았다. 행정당국은 그들을 공항 터미널에 방치해버렸다. 필자는 지평에서 설립한 공익변호사단체인 ‘사단법인 두루’에서 일하고 있는 전업 공익변호사이다. 이 글은 그들의 법률대리인으로서 소송을 맡았던 필자가 재판과정을 정리한 후기이다. |
악성민원인
어느 평온한 일요일 아침이었다. 별다른 일정도 없었던 나는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에서 연락이 왔다. 한 난민가족이 인천공항에서 정식 난민심사를 받을 기회를 받지 못한 채 입국을 거부 당했고, 오늘 중으로 송환될 것이라고 했다. 난민가족은 돌아가면 목숨이 위험하다면서 송환을 거부하고 있고, 변호사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고 했다. 상황이 급박해 보였다.
무작정 집을 나섰다. 사무실에 가서 팩스로 접견신청서를 보내고는 홀로 공항에 갔다. 그 난민가족은 프랑스어를 쓴다고 했는데, 같이 접견 갈 통역사를 알아볼 시간이 없었다. 말은 안 통하더라도 일단 변호사와 접견이라도 하면 강제로 송환시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급하게 공항 출입국관리사무소로 향했다.
“주말에 이렇게 막무가내로 접견을 신청하시면 어떡해요.” 출입국관리사무소의 공무원은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다. 주말에 접견을 하려던 전례가 없었나 보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에서 난민신청을 한 사람은 언제든 송환될 수 있는 위험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도 변호사가 ‘공항난민’에 대한 접견을 신청하자 그 공항난민이 접견시간 직전에 송환되어 버린 사례가 있다고 들은 터였다. 순순히 돌아가면, 그날 밤으로 그 난민가족을 송환시켜 버릴까 겁이 났다.
그래서 어떻게든 우기기로 결심했다. 혹시라도 이런 일이 생길지 몰라서 공항으로 가는 길에 판례들을 찾아두기도 한 바였다. ‘공항난민이 변호사를 접견할 권리는 최근 헌법재판소도 분명하게 인정한 권리인데, 더구나 당장 오늘 송환될 것이 우려되는 상황인데, 일요일이라고 접견을 거부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부당한 접견거부로 국가배상이 인정된 사례도 있는데, 책임질 수 있느냐’고 언성을 높였다. 나는 ‘악성민원인’이라도 될 각오였다.
당황한 공무원은 담당 부서인 난민팀에 다시 알아보겠다며 나에게 밖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무원이 나를 불렀고, 담당자를 전화로 연결해주었다. 난민팀 담당자는 화가 나 있었다. “오늘 밤에 송환시키지 않을 것이니 오늘은 일단 돌아가세요.” ‘악성민원인’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고, 다음 날 다시 찾아간 공항에서 그 난민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첫 접견
나는 공무원에게 임시출입증을 발급받아서 ‘공항 탑승구역’으로 들어갔다. 탑승 게이트와 면세점이 위치해 있는 보안검색대 안의 공간이 바로 ‘공항 탑승구역’이다. 양쪽에 늘어선 면세점 사이를 쭉 걸어가면 46번 게이트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중년의 부부와 열 살이 안 되어 보이는 네 명의 아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무원은 우리를 공항 접견실로 안내했다. 접견실은 탑승구역 바로 아래 층에 위치해있었다. 46번 게이트 앞에는 관계자만 사용하는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그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층만 내려가면 바로 접견실이 나왔다. 한 층만 내려가도 터미널의 북적거림은 기분 나쁜 적막함으로 변했다. 접견실 바로 옆 방에 ‘송환대기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탑승 게이트와 매우 가까운 곳에 이처럼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접견실은 한 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공무원이 접견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그 난민가족들에게 내 소개를 했다. 부부는 불안에 가득 찬 모습이었고, 아이들도 표정이 어두웠다. 부부는 다급한 목소리로 본인들이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부부의 부모들은 원래 앙골라 사람이라고 했다. 그들의 부모는 1970년대에 앙골라 내전을 피해 콩고민주공화국으로 피난을 갔고, 그곳에서 이들 부부를 낳았다. 부부는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2000년대 초에 앙골라의 정세가 비교적 안정화되자 앙골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들 부부처럼 콩고에서 돌아온 난민들은 앙골라에서 탄압을 받았다고 했다. 이들은 이름 대신 ‘레그레사도’라는 멸칭으로 불렸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고 했다. 앙골라 정부가 국내 치안의 강화를 명분으로 내걸은 ‘권위회복 작전(Operation Resgate)’을 수행하면서, 그 일환으로 엄청난 수의 콩고 출신자들을 강제추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콩고 출신자들에 대한 폭력 행사와 인권 탄압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
루렌도 가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택시기사로 일하던 ‘남편’ 루렌도씨는 경찰차와 접촉사고를 냈다는 이유만으로 수용시설에 불법 구금되었고, 그곳에서 고문도 당했다고 했다. 루렌도씨는 접견 중에 고문의 상처를 직접 보여주면서 당시에 겪었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다. 그리고 루렌도씨가 수용시설을 탈출하자, 경찰은 루렌도씨를 잡기 위해 루렌도씨의 집에 찾아왔고 그곳에 루렌도씨가 없는 것을 알고는 ‘부인’ 바체테씨를 폭행했다고 했다. 루렌도씨와 바체테씨의 ‘아이들’도 레그레사도라는 이유로 앙골라의 공립학교에서 당하는 심한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유엔 프로그램에 따라 운영되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야 했다. 결국, 루렌도 가족은 앙골라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다고 들은 한국을 도피처로 택했다.
루렌도 가족은 우여곡절 끝에 인천공항에 도착했지만, 입국을 거부당했다. 그리고 루렌도 가족은 공항에서 난민신청을 했지만, 행정당국이 그들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행정당국은 두어 시간의 면접만을 하고는 ‘이들 가족은 명백히 난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정식 난민심사에 회부하지 않은 채, 이들을 송환시키기로 결정했다. 루렌도 가족이 본국으로 돌아가면 목숨을 잃을 것이라며 송환을 거부하자, 행정당국은 이들을 공항 탑승구역의 46번 게이트 앞에 방치해 버렸다고 했다.
어느 정도 사정을 파악한 나는 접견을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왔고, 앙골라의 정세를 알아보았다. 그들 말대로였다. 해외의 언론과 국제기구, 인권단체는 앙골라에서 자행되고 있는 콩고 출신자들에 대한 박해사례들을 보고하며, 이에 대한 강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었다. 최근 1년 사이에 추방당한 콩고 출신자들이 40만 명에 이른다고 했다. 콩고 출신자들이 앙골라에서 공권력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폭행을 당하거나, 재산을 약탈 당한 사례들이 보고되어 있었다. 이들은 사소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때때로 처형되기도 했다. 국제인권단체는 이 과정에서 자행되는 성폭행에 대해서도 별도의 보고서를 냈다.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이 최근 콩고 출신자들의 추방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에 대해서 앙골라 정부를 비판하는 공식성명을 낸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앙골라에서 콩고 출신자에 대한 대대적인 ‘국가폭력’이 자행되고 있음은 명백했다. 루렌도 가족에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도 그 피해사례 중 하나임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루렌도 가족이 ‘명백히 난민이 아니’라고 단정지은 것은 섣부른 판단임이 분명했다.
나는 루렌도 가족의 사건을 맡기로 결심했다. 지평과 두루의 변호사님들, 그리고 외부의 변호사님들과 대리인단을 꾸렸다.
‘공항 바라지’
재판을 위해서는 루렌도 가족의 난민신청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해야 했다. 앙골라의 국가정황을 알아보고, 루렌도 가족이 겪었던 사건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는 일이 필요했다.
하지만 재판준비보다 급한 일이 있었다. 루렌도 가족이 공항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행정당국은 이들에게 잘 공간이나 식사를 제공하지 않았고, 루렌도 가족은 공항에서의 숙식을 모두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한국에 가져온 돈이 넉넉하지 않았던 루렌도 가족은 당장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재판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라도 루렌도 가족에게 최소한의 생존환경을 보장하는 일이 먼저였다. 끼니는 재판날짜보다 먼저 돌아왔고, 자주 돌아왔다.
식사 문제가 가장 시급했다. 재산의 대부분을 한국행 비행기표를 마련하는 데에 써버린 루렌도 가족은 한국에 입국할 때 수중에 돈이 많지 않았는데, 공항 탑승구역에서는 한 끼 식사에 최소 만 원이 들었다. 매 끼니마다 돈은 줄어갔고, 그와 반비례해서 가족들의 불안감은 커져갔다.
아이들은 하루에 두 끼, 부부는 하루에 한 끼를 먹고 있다고 했다. 부부는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내일을 위해 돈을 아끼고 있다고 했다. 나는 돈을 어떻게든 마련해볼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그들의 불안을 달래보려 했다.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재판을 위해서는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식사에 돈을 아끼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다. 하지만 소용 없었다. 언제 밥 사먹을 돈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우려는 내 말 한마디로 쉽게 떨쳐버릴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을 보며, 나의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중에 고향을 버리고 남으로 내려와 내일의 끼니를 장담할 수 없는 피난생활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절약이 철저히 몸에 배었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나는 종종 ‘그렇게까지 절약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따져보았지만, 내 말이 통했었던 적은 없었다. 기아의 공포는 논리로 이길 수 없는 것이었다. 루렌도 가족과 나의 할아버지는 모두 난민이었고, 그들은 내가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었다.
나는 구호단체와 아동단체에 연락을 돌렸다. 다행히도 여러 단체들이 발 벗고 나서서 지원을 해주었다. 공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체크카드를 지원해주는 곳도 있었고, 현금을 전달해주는 곳도 있었다.
언론을 통해 루렌도 가족의 상황이 알려지자, 루렌도 가족을 직접 돕고 싶다는 연락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주변 사람들과 십시일반 모은 돈을 전달해주고 싶다고 했고, 누군가는 공항에서 과일을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들었다며 출국하는 길에 직접 사과와 바나나를 전해주겠다고 했다. 칫솔을 구하기 어렵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여러 시민들이 세면도구 세트를 선물한 덕에 루렌도 가족은 ‘칫솔 부자’가 되기도 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처럼 여러 도움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을 즈음, 나는 재판 준비를 위해서 공항에 접견을 갔다가 루렌도 부부로부터 요즘은 하루에 두 끼씩을 꼬박꼬박 챙겨먹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의 불안도 다소나마 누그러진 느낌이었다. 그들이 하루에 두 끼씩을 사먹는 ‘결단’을 내리는 데에는 수중에 있는 돈의 액수보다도 여러 사람으로부터 받은 ‘환대’의 경험이 더 큰 영향을 준 것 같았다. 덩달아 나의 걱정도 조금은 줄어들었다.
인천공항 46번 게이트에 사는 가족을 아십니까? (중)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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