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터미널>에서, 동유럽 어느 작은 나라 출신의 주인공은 부푼 꿈을 안고 뉴욕 JFK 공항에 도착한다. 그런데 그가 미국으로 날아가는 동안 본국에서 내전이 일어나서 그의 비자가 취소되는 바람에, 그는 미국으로 입국할 수도 없고 전쟁터로 변해버린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영화는 9개월간 이어지는 그의 ‘공항 노숙생활’을 그린다. |
인천공항 46번 게이트에 사는 가족을 아십니까? (중)에서 이어집니다.
여러 모색들
대리인단은 1심이 진행될 때부터 재판과 병행해서 루렌도 가족을 입국시킬 수 있는 여러 수단을 모색했다. 루렌도 가족을 계속 공항에서 지내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1심에서 패소하고 항소를 제기한 이후에도 루렌도 가족을 입국시키도록 하고 적어도 공항에서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대리인단은 국제인권메커니즘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유엔 자의적 구금에 관한 실무그룹에 루렌도 가족의 입국을 권고하여 줄 것을 청구했고, 유엔 교육권 특별보고관과 유엔 이주민 특별보고관에게 각각 진정서한을 보내 한국의 공항에서 인권이 침해되고 있는 상황을 호소했다. 유엔 아동권리위원회의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정기 심의절차에서도 루렌도 가족의 아이들에게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권고가 나올 수 있도록 노력했다.
또한 대리인단은 공항에서의 간이 난민심사 제도가 가지고 있는 위헌성을 지적하는 위헌법률심판 제청신청도 제기했다. 난민법 제정 당시부터 제도의 위헌성에 대해 꾸준한 문제제기가 있어왔는데, 이 문제에 대한 헌법적인 판단을 구한 것이다.
샤워실 이용문제가 해결된 이후에도 국가인권위원회에 추가로 진정을 넣었다. 특히 난민인정심사 불회부결정에 대한 이의신청 기회가 보장되지 않고 있다는 점과 공항에서의 생활은 아동에게 더욱 치명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법무부장관과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서한을 보내서 소송이 계속되는 기간만이라도 루렌도 가족의 입국을 허가하여 줄 것을 탄원하기도 했고, 법무부 인권정책 자문위원에게 법무부의 조치를 촉구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성과도 일부 있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두 차례에 걸쳐서 공항난민에게 이의신청 기회를 보장할 것과 공항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아동들의 입국이 가능하도록 제도를 개선할 것을 요구하는 정책권고를 냈다. 유엔 아동권리위원회의 르네 윈터(Renate Winter) 위원은 대한민국 정부에 루렌도 가족의 아이들에 대한 즉각적인 조치를 요구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가 가족들의 입국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결국은 2심 재판에서 이겨야 했다.
2심 재판
1심에서 패소한 후에, 나는 루렌도 가족에게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해서 공항에서 노숙을 할 수 있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미 몇 달째 공항에서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 공항생활이 더 이어진다면 이들이 건강을 크게 해치게 될 것 같아 걱정됐다.
가족들의 대답은 단호했다. 어차피 앙골라로 돌아가면 죽는다며, 죽더라도 이곳에서 재판을 받다가 죽겠다고 했다. 제3국으로 가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재판을 이기는 것 외에 다른 뾰족한 방도도 없는 상황이었다. 가족들은 본인들을 위해서 계속 다투어달라며, 오히려 낙담해있는 대리인단을 위로했다.
대리인단은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1심에서 진 이유를 분석했다. ‘이웃 주민의 전언’이 주된 패인이라고 판단했다. 그것을 뒤집어야 했다.
이 일에 동료 변호사님이 앞장섰다. 앙골라로 직접 갈 수는 없지만, 최대한 현지의 사정을 알아보자고 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고 했다.
대리인단은 이웃 주민의 연락처를 알아보고 전화통화를 시도했다. 루렌도 가족이 도피 과정에서 도움을 받았던 본국의 교회 사람들에게도 연락을 해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달라고 했다. 앙골라에서 살고 있는 교민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앙골라에 지부를 두고 있는 국제적인 선교단체에 사실확인을 부탁하는 것도 시도했다. 앙골라와 연결될 수 있는 모든 연을 동원해보려 했다.
멀리 한국에서 앙골라의 사정을 파악하는 것은 정말 만만치 않았다. 앙골라의 통신사정이 열악한 탓인지 전화가 끊기거나 문자메시지를 통한 연락이 한동안 두절되는 일이 잦았다. 무엇보다도 언어의 장벽이 높았다. 번역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해서 현지의 사람과 더듬더듬 문자메시지를 주고 받았고, 통역사의 도움을 받아 전화통화를 시도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 동료 변호사님은 국제전화비만 수십만원이 나왔다고 했다.
다행히 성과가 있었다. 루렌도 가족이 도움을 받았던 현지 교회의 목사님은 루렌도 가족이 당했던 박해와 도피과정을 소상히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이웃 주민’과도 연락이 닿았는데, 그는 루렌도씨에게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한국으로의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없고 그런 말을 들었다고 대사관 직원에게 말한 적도 없다고 했다. 대사관 직원과는 다른 얘기만을 나누었는데, 왜 대사관 직원이 그렇게 말하는지 의아하다고 했다. 이웃 주민의 말은 상당히 구체적이었고, 신빙성이 높아 보였다. 적어도 그의 말을 전한 대사관의 몇 줄짜리 회신보다는 훨씬 믿을만했다.
루렌도 가족이 한국에 온지 아홉 달 정도 지났을 때, 2심 판결이 선고되었다. 재판장은 주문에 앞서 판결이유를 자세히 설명했다. 이를 듣고 있는 내 가슴은 미친 듯이 뛰었다. 우리에게 유리한 말 한 마디, 불리한 말 한 마디가 나올 때마다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제1심 판결을 취소한다. 원고들에 대한 난민인정심사 불회부결정을 취소한다.’
루렌도 가족은 2심에서 승소했고, 2심 판결이 있은 후 며칠 지나서는 한국으로 ‘입국’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인천공항에 도착한지 288일만의 일이다.
“얘네들 내일도 와요?”
루렌도 가족이 입국하고 조금 지나서였다. ‘공항 바라지’를 함께 했던 난민인권활동가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루렌도 가족의 집에 찾아간 김에 루렌도 가족 아이들과 놀이터에 다녀왔다고 했다. 아이들은 활동가 선생님을 제쳐두고 놀이터에 있던 한국 아이들과 노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고 했다. 한국 아이들은 저녁이 되어 루렌도 가족 아이들이 집에 돌아가야 하자,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얘네들 내일도 와요?”라고 물었다고 했다. 이들이 함께 어울려 노는 데에는 언어도 장벽이 되지 못했고, ‘인권’이라는 거창한 개념도 필요 없었다.
통화를 마치고, 나는 루렌도 가족의 첫째 아이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공항에 있을 때 그는 나중에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공항에서 변호사들을 자주 만난 영향인 듯싶어서, 한편으로 흐뭇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입국 직후에 다시 만났을 때, 그는 꿈이 대통령이라고 했다. 나는 그가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서 보다 큰 꿈을 꾸게 된 것이 기뻤다.
이런 기억을 회상하고 있을 때, 활동가 선생님은 나에게 사진을 한 장 보내주었다. 사진 속에서, 대통령이 꿈인 앙골라 아이는 다른 한국 아이들과 사이 좋게 어깨동무를 한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 루렌도 가족은 상고심에서 최종 승소했고, 이들 가족에 대한 정식 난민심사는 시작되었다. 2020년 5월 현재 루렌도 가족은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생계비로 경기도 모처에 집을 얻어 생활하고 있는데, 조만간 취업을 해서 자립을 할 예정이다. 루렌도 가족의 아이들은 인근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한편, 한국의 공항에는 지금도 또 다른 ‘루렌도 가족’들이 살고 있다. 제도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이상 이러한 현실은 계속될 것이다.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사단법인 두루는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목표로,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공항난민 인권개선을 위한 모니터링 사업’을 수행 중이다.
담당 변호사 이상현 (02-6200-1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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