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건의 개요
아이쿱소비자생활협동조합연합회(이하 '아이쿱')는 2020년 4월 총회를 개최하여 정관에 공제사업을 추가하는 정관 개정을 의결하였습니다. 아이쿱은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에 정관변경인가 신청을 했지만, 공정위가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이하 ‘생협법’)에 의하면,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 연합회는 회원에 소속된 조합원을 대상으로 하는 공제사업을 할 수 있습니다(제65조 제3호). 공정위는 '공제 사업의 안정적 시행과 소비자 피해 방지' 등을 거부사유로 내세웠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사유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공정위는 지난 10년 간 공제사업의 세부인가, 감독 기준을 마련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공정위가 내세운 거부사유에는 공정위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법으로 허용하고 있는 사업의 내용을 ‘정관’에 추가하는 것마저 거부하는 것은 공정위가 재량을 남용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좇아 정관으로 정한 목적의 범위 내에서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됩니다(민법 제34조). 법률에서 법인이 할 수 있는 사업을 명시하고 있는데, 그 사업을 정관에 넣는 것을 거부하였다는 사례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공정위의 거부처분은 위법하다고 보아 행정소송을 제기하기로 하였습니다.
두루는 2020년 8월 아이쿱을 대리하여 법원에 공정위의 거부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를 제기하였습니다. 지평에서는 김강산, 박호경, 채수평 변호사님이 함께 해주셨고, 세이프넷 소속이셨던 조제희 변호사님도 함께 해주셨습니다.
2. 소송 경과
가. 1심
2021년 8월, 1심에서는 패소하였습니다. 서울행정법원은 “연합회 공제사업의 위험성을 고려하여 2014. 10.경부터 연합회 관계자, 보험·공제분야 전문가, 유관기관 관계자 등이 참여한 생협 공제사업 T/F를 구성하여 공제사업의 안정적 운영 방안 등에 대해 논의를 하여 왔고, (중략) (다만, 위와 같은 생협법 개정안은 주무부처를 공정위에서 기획재정부로 변경하는 논의와 맞물려 보류되었다가 국회의 회기 만료로 폐기되었으나, 현재까지도 주무부처 이관 및 연합회 공제사업 수행에 따른 소비자 보호, 건전성 확보 등에 관한 논의는 계속 중인 것으로 보인다)” 라고 판단하였고, 재량권을 남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다른 생협연합회가 유사한 사안에서 2017년 소송을 제기하여 패소한 사건(대법원 판결)이 있는데, 그 사건과 거의 유사한 판단이었습니다. 공정위는 유사한 사안에서의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정관변경 거부가 정당하다고 주장했고, 이를 참고자료로도 제출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생협법 개정안이 제출되고 얼마되지 않았던 2017년 사건이었고, 저희는 2020년 사건이라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또한 법리적으로도 이 사건은 ①입법 미비를 이유로 거부한 처분은 삼권분립의 원칙 및 행정입법 의무를 위반하여 위법하고, ②공정위가 제시한 처분 근거는 당해 행위를 일률적으로 금지하는 처분이므로 위법하다고 보아 항소하였습니다.
나. 2심
항소심(2심)에서도 열심히 다투었습니다. 먼저 정관변경인가는 공제사업인가와 다르다는 점에 주목하여 해양수산부, 중소벤처기업부에 ‘정관변경을 해주어도, 공제사업인가(공제규정인가)를 거절한 경우가 있는지, 두 절차는 달리 진행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또한 공정위는 아이쿱의 정관변경을 거부하면서 ‘생협 공제사업의 건전성 확보 및 감독 강화를 위한 제도 개선 사항들을 내부적으로 검토’를 하였다고 회신하였는데, 실제로 검토한 사례가 있는지, 있다면 이를 제출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저희의 예상과 같이 두 부서에서는 다른 절차로 두 인가를 운영하고 있었고, 공정위에서는 실제로 내부적으로 검토한 공식 문서는 없다고 답변하였습니다. 저희에게 유리한 증거들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생협의 역사, 일본 생협 공제사업의 현황, 외국 협동조합의 공제사업, 협동조합금융 사례, 한국 생협의 공익적 목적 사업 사례, 생협 전문가(일본 니혼대학 교수)의 의견서 등을 제출하면서, 생협이 공제사업을 하는 것이 이례적이 아니며, 외국에서 보편적으로 시행되고 있고, 공익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자료를 제출하였습니다.
서울고등법원에서 저희의 주장을 받아들여, 2022년 9월 항소심(2심)에서 승소하였습니다. 공정위의 상고로 대법원까지 사건이 올라갔고, 약 1년 6개월의 기다림 끝에 최종 승소하였습니다.
3. 판결의 내용 및 의미
가. 판결의 내용
서울고등법원은 1심 판결을 취소하면서 공정위의 거부처분이 ‘생협법이 생협 연합회가 수행할 수 있는 사업의 하나로 공제사업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정위가 어떠한 생협 연합회도 공제사업을 하지 못하도록 봉쇄하는 것은 입법자의 분명한 의사에 정면으로 반하고, 생협 연합회의 권리를 부당하게 제약하는 것’ 판단하여 공정위의 처분이 재량권을 남용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즉, 공정위의 거부처분이 국회의 입법권을 침해한다고 보았습니다.
대법원에서도 서울고등법원이 ‘원고의 공제사업 적격성에 대한 검토 없이 입법자의 의사에 반하여 어떠한 연합회도 공제사업을 하지 못하도록 봉쇄하여 원고의 권리를 부당하게 제약하므로 재량권을 일탈․남용하여 위법하다고 판단’한 것이 정당하다고 보았습니다.
행정소송법 제30조 제2항에 의하면, 행정청의 거부처분을 취소하는 판결이 확정된 경우에는 처분을 행한 행정청이 판결의 취지에 따라 이전 신청에 대하여 재처분을 할 의무가 있습니다. 대법원 판결에 따라 공정위는 아이쿱 정관에 대해 이전 신청에 대한 재처분, 즉 정관에 공제사업을 추가하는 신청을 인가해줘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나. 사안의 의미
‘공제’란 생활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상부상조 정신으로 움직이는 경제적 공동 보장제도입니다. 최근 한국 사회는 특수고용직, 프리랜서, 플랫폼노동 등 불안정한 노동형태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회보장제도는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국가의 사회보장제도 확대와 함께 이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수단중 하나가 ‘공제’가 될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 공제 도입 필요성에 가장 먼저 부응할 수 있는 조직은 생협과 협동조합 같은 사회연대경제조직입니다.
예를 들어 ‘공익활동가 사회적협동조합 동행’은 협동조합 기본법에 따라 상호부조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동행에 매달 회비를 낸다면 공익활동가가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지원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활동가들이 스스로 조성한 기금은 목돈이 없는 공익활동가들이 갑작스러운 병이나 경조사 등으로 긴급생활자금이 필요할 때, 고강도 업무로 활동가들이 지치지 않도록 자기 계발과 휴식을 위한 경비로 지원됩니다.
생협은 2010년 3월 개정된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에 따라 조합원을 대상으로 공제 사업을 할 수 있었지만, 공정위는 공제사업 시행을 위한 감독기준, 시행령·시행규칙 마련 등 후속 조치를 전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023년 9월에는 5대 생협연합회와 공정거래위원회가 제도적 보완사항을 검토했고, 이를 바탕으로 개정안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대법원에서 판결이 난 만큼, 이후 생협 공제사업 시행을 위한 감독기준, 시행령, 시행규칙 등이 마련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금이라도 국회의 조속한 통과를 기원합니다.
장기적으로 생협의 공제가 한국 사회에 연착륙 한다면, 생협의 사례를 바탕으로 사회적 연대와 상호부조에 기반한 공제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나아가 프리랜서 ∙ 플랫폼 노동자 ∙ 자활노동자 등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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