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은 희망을 따라 도착한 곳
그런 무력감을 아시나요. 불편하고 부당하고 이상한 세상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 또는 무엇을 해도 세상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는 생각. 법과 판례들은 그 무력감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 단비처럼 그 감각을 한 번에 해소해 주기도 했습니다. 판결 하나가 얼마나 많은 소수자들의 삶을 지켜내는지를 느낄 때면 조금은 벅차오르기도 했고요. 법을 통해 나도 무언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이 피어올랐습니다. 그 희망을 품고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했고, 인권법학회 등 각종 인권과 법이 연결되는 지점들을 찾아다녔으며···마침내 두루에 도착했습니다.
두루는 제게 내내 오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두루를 처음 알게 된 건 2019년 여름 인:연(전국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학회 연합)캠프에서 이주언 변호사님이 진행하신 장애인차별구제소송 강연을 통해서였습니다. 장애와 차별의 고리를 끊어낼 방법을 고민하던 제게는 그 짧은 강연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장애인차별구제소송을 한다는 건, 그리고 그런 소송을 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한다는 건 어떤 경험일까. 궁금했고, 기대에 부풀었고, 꿈꾸게 됐습니다.
2. 공통과제: 환자나 노인이 되면 장애가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두루에서 보낸 2주는 여행 같았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탐험할 때처럼 무언가를 배우고, 깨닫고, 기존의 생각이 바뀌는 걸 경험한 시간이었습니다. 동시에 그곳에서 했던 크고 작은 활동 하나하나가 다 바라마지 않던 것들이어서 행복했습니다.
장애인권리협약에서는 장애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장애는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개념이며, 손상을 지닌 사람과 그들이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사회에 완전하고 효과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저해하는 태도 및 환경적인 장벽 간의 상호작용으로부터 기인한다.’ 제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던 정의입니다. 보통의 장애에 대한 관념은 내재적이며 고정된 것이고, 기존의 제 생각 역시 다르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두루에서의 시간을 지나온 지금은 저 문장에 보다 깊이 공감합니다. 장애는 내부뿐 아니라 외부에, 우리 사회에 있습니다. 무엇을 장애로 규정할 것인가, 규정된 장애인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는 그 사회의 인식과 태도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공통과제는 우리 사회가 노인이 된 장애인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장애로 인해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 제공되는 장애인활동지원급여는「노인장기요양보험법」상의 ‘노인등’을 그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65세 미만의 노인성 질환을 가진 장애인과 65세 이상의 장애인은 특정 질환을 앓는다는 이유로, 혹은 특정한 나이가 되었다는 이유로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의 적용 대상이 되어 최대 24시간 받을 수 있었던 활동보조를 비장애 노인과 동일하게 4시간밖에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 결과 누군가는 요양보호사가 올 때까지 20시간 가까이 소변을 참아야 하고, 누군가는 20시간 동안 배고픔을 견뎌야 하며, 누군가는 해가 뜨고 지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 채 20시간을 누워 있어야 합니다.
지극히 비인간적인 상황을 초래하는 장애인활동지원법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서를 작성하면서, 과거 제도가 소수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평면적이었는지를 느꼈습니다. 노인과 장애인이라는 질적으로 다른 두 소수자 집단을 마치 하나의 수급자 집단처럼 취급해왔고, 그에 따라 두 집단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하나의 집단에 편입될 것을 강제해왔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장애인 당사자의 실제 삶의 형태나 선택권 같은 건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소수자들은 그저 복지의 ‘대상’이자 수동적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장애를 갖게 되기도, 나이를 먹기도, 심각한 질병을 얻게 되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경우에 우리는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도움은 중단되어선 안 됩니다. 인간으로 존재하는 이상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는 지속적으로 보장되어야 합니다.’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서 말미에 썼던 문장입니다. 분명 현재의 제도는 현존하는 공포지만, 그 공포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을 찾아 분석하고, 문제를 지적하며, 위헌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은 제게 큰 효능감을 주었습니다. 아직은 배우는 과정에 불과하지만 언젠가는 내가 쓴 문장으로 누군가를 설득시킬 수 있었으면, 그래서 세상이 조금이나마 변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3.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
두루에서의 매일은 배움이었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장애 인권에 관심이 있었고 두루에서 장애인차별구제소송을 비롯한 장애인 관련 공익소송을 주로 진행한다는 사실이 주된 지원 동기였기에 부끄럽게도 다른 인권 영역에 대한 관심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두루에 와서야 제가 다른 영역에 있어서 얼마나 무지하고 둔감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지현영 변호사님의 환경권에 대한 강연을 듣고 나서는 매일같이 가던 카페의 테이크아웃용 종이컵이 거슬렸고, 결국 실무수습이 끝나고 리유저블 컵을 주문하게 되었습니다. 경제학 전공임에도 사회적 경제라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조차 잘 몰랐는데 김용진 변호사님의 강연을 듣고 길가에 보이는 협동조합들을 눈여겨보게 되기도 했습니다.
또, 외부 활동으로 다녀왔던 <구금시설 인권실태와 개선방안> 토론회에서는 아동과 국제 영역에서 ‘구금’과 ‘탈시설’이라는 점에서 장애 영역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신장애와 관련해 치료감호소의 인권 문제를 다뤄주신 신권철 교수님께서는 구금이 “복지의 탈, 치료의 탈”을 쓰고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외국인 보호소의 인권문제를 발표하신 이윤정 활동가님께서는 “말이 보호소지 사실상 구금시설”이라고도 하셨는데, 이와 같은 발언들이 공통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보호라는 명목하에 국가에서 소수자들을 격리하고 배제해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게 격리된 시설 안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는 오늘에 이르도록 외부 사회에 좀처럼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토론회에서 본 사진들, 발표 내용들은 하나같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이었습니다. 어떠한 명목이든, 어떠한 대우를 제공하든 상관없이 시설은 본질적으로 인권 침해를 내재하고 있었습니다.
강정은 변호사님이 발표하신 소년보호시설 인권문제는 발표가 끝난 후에도 제 마음에 일종의 부채감 같은 것을 남겼습니다. 청소년보호법상 ‘우범소년’이라는 모호한 표현이 가진 위험성, 그로 인해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소년재판을 받게 되는 아이들, 재판에서조차 경청 대신 호통이 떨어지는 현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자유를 박탈당하는 경험은 어떤 의미로 남을지, 그 아이들은 어떤 성인으로 자라게 될지 조금은 막막한 마음으로 생각하게 됐습니다. 아이들에게는 형사 제재 대신 한 명의 기댈 어른이 훨씬 더 필요하고, 그것이 훨씬 더 효과적인 범죄 예방 대책일 것이라는 변호사님의 말씀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그동안 각 가정의 몫으로, 혹은 각 시설의 몫으로 사회가 소수자들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떠넘겨왔던 건 아닐까요.
이러한 생각은 십대여성인권센터의 조진경 대표님 강연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아동·청소년 성착취 실태와 대책>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통해 국가가 아동·청소년 성착취 문제에 있어서도 유사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범소년’과 마찬가지로 ‘대상청소년’이라는 용어로 아이들을 규정하고 처벌해왔다는 점, 보호를 위한 법을 만들고 안전한 환경을 제공하는 대신 각 가정의 양육환경에 문제를 떠넘겨왔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했습니다. 방치의 결과 범행 방법의 다양화·정도의 심각화·피해자의 저연령화 등이 진행되었고, 오늘날 N번방 사건과 같은 끔찍한 범죄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조진경 대표님은 가해자에게 주목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젠더폭력의 프레임을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바꿈으로써 다른 이들이 피해자의 신상을 파헤치거나 피해자가 피해자성을 증명하는 데 에너지를 쏟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성폭력 사건을 두고 피해자를 공격하는 발언들 앞에서 어찌할 줄 몰라 당황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프레임을 바꾼다는 발상이 참신하게 느껴졌습니다. 생각해보면 피해자에게 결백함 등 이른바 ‘피해자다움’을 요구하고, 그에 맞지 않으면 비난하는 방식은 성범죄에만 있는 이상한 문화입니다. 다른 어떤 강력범죄에서도 우리는 피해자가 피해를 입을 당시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성범죄를 범죄로 취급하는 것, 성범죄자를 범죄자로 대우하는 것이야말로 법 집행의 실효성을 확보하는 방안일지도 모릅니다.
기억에 남는 강연 중 하나는 임성택 이사님이 진행하신 임팩트 소송에 관한 강연입니다. 공익변호사로 활동한다는 것은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수없이 많은 좌절을 견뎌내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과정에서 또다시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제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사님께서는 공익변호사도 충분히 승소할 수 있다며 승소를 위한 전략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좌절을 예감하고 일을 시작할 필요는 없다는 것, 대신 보다 오래 고민하고 신중하게 접근함으로써 좌절할 확률을 낮출 수 있다는 것. 제게는 모두 힘이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다만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공익변호사의 수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이사님께서는 당위와 시의성의 긴장 사이에서 적절한 시기를 기다려야 하고, 그 전에 법률에 대한 꼼꼼한 검토를 통해 법적 공백 혹은 해석가능성이 존재함을 확인해야 하며, 동시에 기존의 해석틀에 갇히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고민을 거친 탈시설 소송과 모두의 영화관 소송, 1층이 있는 삶과 시외 이동권 보장 소송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두루의 변호사님들을 비롯한 공익변호사님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들 안에서는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는 마음과 현실에 대한 판단력, 숱한 고뇌가 매 순간 충돌했을 것입니다. 또한 좌절하는 순간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패소를 예견하면서도 세상에 문제를 알리기 위해 소송을 한다고도 하셨으니까요. 그럼에도 무언가를 시작하는 마음은 얼마나 단단한 마음일까요.
5. 영역별 과제: 부당함에 맞설 때, 당신의 기댈 곳이 되어줄게요
장애 영역의 영역별 과제는 지하철역 엘리베이터 설치 청구 소송의 항소이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신길역 휠체어 리프트 사고 이후 오랫동안 착잡한 마음으로 손해배상청구 소송 등을 찾아보곤 했던 제게는 무거운 책임감을 안겨준 과제물이었습니다. 2020년에도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지하철을 타러 나가야 하는 현실에 대한 과제물이기도 했습니다. 장애 영역의 윤다여 시보님과 저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사안에 대한 접근법부터 세세한 쟁점까지 모든 것을 토론하고 조율해가며 조심스럽게 글을 써나갔습니다. 더 잘 알고 잘 해내고 싶어 장애인차별금지법과 동법상 적극적 구제조치에 관해 논문과 기사를 찾아 읽었고, 인권위원회의 진정 결과와 정보공개청구 결과도 참고했습니다.
피고 서울교통공사에게 승강기 설치 의무가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 교통약자법에 관한 해석론을 제시했고, 표면적인 엘리베이터 설치 대수가 아닌 ‘1동선’이라는 장애인의 실질적 이동권 보장을 판단의 기준으로 내세웠습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48조 제2항으로부터 이행청구권이 도출되며, 따라서 소송의 성격은 이행의 소가 되어야 함을 논증했고, 구제조치 판결 여부를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에 의해 도출하고 있는 점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 차별행위의 존부, 경사형 승강기와 휠체어리프트의 차이 등을 파고들며 놓치는 쟁점이 없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마침내 이주언 변호사님으로부터 상당히 훌륭하다는 칭찬을 들었을 때에는 뿌듯함과 함께 안도감, 함께 해준 시보님에 대한 고마움이 밀려왔던 것 같습니다.
두루에서 느낀 점 중 하나는 공익변호사의 업무에서 협업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과제물을 수행하며 협업으로부터 나오는 시너지를 느낄 수 있었고, 결코 저 혼자 짐을 다 지고 갈 필요는 없으며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두루의 변호사님들 그리고 우리 시보님들처럼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이들이 제게 기댈 곳이 되어줄 것입니다. 저 역시, 언젠가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6. 탈시설, 위험할 권리를 위하여
두루에서의 첫날, 첫 활동으로 내부규칙을 정하던 순간이 생각납니다. 2주를 위한 규칙인데도 저와 다른 시보님들은 단어 하나도 신중히 골라가며 규칙을 정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떻게 해야 서로를 존중할 수 있을지, 어떤 가치가 차별적이고 어떤 단어가 혐오적인지, 누군가가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상황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를 떠올리게 됐습니다. 7개의 조항을 만들기 위해 3일이 걸렸고 어떤 시보님은 입법자의 괴로움을 알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의견을 조율한다는 것은 이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11명의 시보님들이 모였는데도 그랬는데, 사회 전체의 합의를 도출하는 일은 비교가 안 되게 험난한 과정일 것입니다.
이주언 변호사님은 ‘장애가 장애물이 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군가에게 그를 둘러싼 사회가 장애로 느껴지지 않으려면 사회는 자신의 장벽을 인정하고, 그 안으로 배제된 사람을 들여야 할 것입니다. 법과 제도 안으로요. 이른바 입법입니다. 변호사님께서는 최근 탈시설 입법운동에 주력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시설은 안전과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워 장애인의 기본권을 침해합니다. 그러나 비장애인에게는 당연히 존재하는 ‘위험할 권리’가 장애인에게만 인정되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설사 날 것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고 하도, 그것을 맨몸으로 헤쳐나갈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그들이 무사히 헤쳐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사회의 몫이기도 합니다.
시설의 본질은 격리와 배제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비장애인의 세계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은 안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전히 장애인은 우리 곁에 존재합니다. 사회는 그들이 자신의 구성원임을 인정하면서 그 증거로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했습니다. 장차법이 허울뿐인 약속이 되지 않으려면 궁극적으로 장애인이 사회에서 공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욕망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 전체가 탈시설에 합의하게 되기를, 꼭「장애인 탈시설 및 시설 조사·제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길 소망합니다.